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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의 힘을 믿는 당찬 아가씨 트윗시작! @gommnim  
고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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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5 22:06 내가본세상



2010년 직장인들의 한숨은 깊었다. 껑충 뛴 물가와는 달리 오르지 않는 연봉, 빨라진 퇴직으로 인한 고용불안 등등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시름은 바로 쉬는 날이 적었다는 사실. 직장인들의 유일한 낙인 공휴일이 지난 해에는 지독하리만치 주말과 겹쳐있었다.


대망의 2011년은 그럼 어떨까. 한마디로 대박이다. 새해를 여는 1월 1일은 비록 토요일이었지만, 구정은 2월 첫째 주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무려 5일을 쉴 수 있다. 3.1운동을 기리는 삼일절도 화요일로 월요일 하루 휴가를 낸다면 전주 주말부터 내리 4일을 쉴 수 있다.


5월도 휴일이 풍성하다. 어린이날인 5월 5일은 목요일이고, 석가탄신일은 그 다음 주 화요일이다. 만약 금요일과 월요일 이틀 휴가를 얻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6일 동안 쉴 수 있는 ‘황금연휴주간’을 완성할 수 있다. 6월의 현충일과 8월의 광복절 모두 월요일에 껴있어, 주말과 월요일 3일을 놀 수 있는 기회도 두 차례나 더 있다.


민족 대명절인 추석도 월요일이라 앞뒤로 삼일을 놀고 추가로 전 주 토요일까지 가족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얻을 수 있다. 10월에도 개천절이 월요일이기 때문에 광복절과 마찬가지로 주말 포함 3일의 자유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한 해의 마무리 크리스마스는 애석하게도 일요일에 껴있어, 완벽한 휴식의 ‘해’라는 2011의 대미를 장식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앞서 나열한 휴일들만 해도 2011년은 충분히 직장인들에게 웃음을 선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원래 신묘년은 ‘노는 해’가 아니다. 오히려 ‘일하는 해’에 가깝다. 신묘년의 묘(卯)는 토끼를 상징한다. 토끼는 2월을 상징하고, 12간지로 표시하는 시간 중 묘시는 새벽 5시부터 7시 사이를 가리킨다. 이는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이고, 농부들이 논밭으로 나가는 시간이다. 겨우내 쉬다가 이제 막 일을 시작하는 시기라는 말이다.


신묘년의 의미와는 사뭇 다르지만 2011년의 풍부한 공휴일은 이 시대의 샐러리맨들에게 축복이나 다름없다. 쿵덕쿵덕 방아를 열심히 찧었으니 이제는 조금 쉴 때도 되었다는 의미일까. 정식 신묘년은 음력으로 ‘해’를 헤아리는 조상들에 따르면 구정부터지만, 신묘년이 시작되기 전 2010년동안 힘들었던 우리 직장인들은 미리 웃어도 좋을 듯 싶다.


작년 한 해 열심히 일한 당신! 쉬어라! 

이미지출처: http://cafe.naver.com/logosesang.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179743&topReferer=http://cafeblog.search.naver.com%26imgsrc=20110104_135/sgd1004_1294103292800deCuj_jpg/naver_com_20110104_100503_sgd100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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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마마
2010/10/20 13:56 내가본세상
"알고보니 체육선생님이 우리 학교 학생이랑 결혼을 했다더라" 내가 고3이었던 2005년. 내가 다니던 S여고에는 체육선생님이 자신의 제자와 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일지라도 벌써 그 이야기는 십 수년전 것 일텐데도, 학생들은 진실을 궁금해하며 체육선생님의 눈치를 살폈다.

입시에 지쳐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를 찾는 고 3학생들에게 체육선생님의 스캔들 아닌 스캔들은 분명 흥미있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선생님과 학생이 결혼을 하냐는 둥, 둘의 나이 차가 15살 이상이라는 둥, 지금은 잘 살고 있다는 둥 별의별 얘기가 다 돌았었다. 선생님과 제자의 사랑은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센세이셔널하며 흥미로운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몇 해 전 TV에서 '로망스'라는 드라마를 방영할 때도 말들이 많았다. 여교사와 고등학생의 사랑이 소재였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학생을 사랑하는 선생님 스스로의 고민과 갈등을 제법 세밀하게 그렸었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구애하는 학생을 밀어내며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라는 이제는 고전적인 유행어가 된 대사도 그때 나왔었다. 학생과 교사는 사랑하면 안 된다는 법도 없건만, 우리 사회에서 아직 사제간의 사랑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금기로 여겨지고 있는 것 같다. 사제지간은 사랑할 수 없는 관계 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사제지간의 사랑을 이상하고 있어선 안 될 것처럼 바라보는 이유는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에 대한 고정관념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무조건 존경해야하고, 선생님의 말씀은 무조건 맞고, 그렇기에 선생님이 시키신 숙제나 공부는 당연히 해야하는 그런 종류의 생각들 말이다.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기에 교사는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존경하고 따라야할 존재라고 여기게 된 것 같다. 사실 교사와 학생은 학교에서만 만나지 않았다면 충분히 사람 대 사람으로 관계를 이어가고, 마음만 맞는다면야 사랑까지 할 수 있는 관계 아닌가. 학교에서 만났고, 둘의 관계가 사제지간이라는 것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는 건 사랑마저도 관계에 계산하고 따져서 해야한다는 얘기인 것 같아 조금 슬프다.

물론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이번에 문제가 된 여교사와 학생의 관계까지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여교사는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랬기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갖는 일은 자제했어야 했다. 근데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녀는 아이들에게 윤리관을 심어주고 가르쳐주어야 할 교사였다. 둘의 사랑이 아무리 깊었다 할 지라도 이는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차원에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당사자들도 당사자들이겠지만 이번 일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여러 사람을 생각하며, 다시금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이번 사건의 여교사도 로망스의 그녀처럼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을까? 남편은 그리고 자신의 아이는 생각해봤을까? 궁금해진다. 사랑은 만고불변의 진리요 보호해야할 가치라고 생각하지만 사랑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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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마마
2010/10/15 18:44 내가본세상


요즘 나는 연이어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사랑으로 아이를 가르치자고 말했던 장자크 루소가 실은 저의 다섯 자식을 고아원에 내다버린 비정한 아비였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게 시작이었다. 두 번째 맞은 뒤통수는 더 아팠다. 행복과 희망을 이야기하던 '행복전도사' 최윤희씨가 남편과 함께 동반자살을 해버린 것이다. 그녀의 희망메시지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런 그녀마저 자살을 하다니 믿기지 않는다. ‘더 이상 행복하기 힘든 사회’, '무책임한 행복전도사'라는 기사에도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는 이유다. 우린 정말 행복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먼저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봐야할 것 같다. 행복이 무언인지 알지 못하면 그에 대한 논의는 모두 모래성 위에 지은 집이 될 터이니 말이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몰라도 나는 행복이 근심걱정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값비싼 옷을 입고, 최고급 외제차를 타고, 7성급 호텔의 주방장이 요리하는 예술품들을 먹는다 한들 마음이 불편하면 제대로 즐길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보다 한참 GDP가 낮은 방글라데시가 우리보다 행복지수가 높다는 말만 봐도 행복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자유와 편안한 마음가짐이다.

누구보다 행복해야할 행복전도사는 그렇다면 왜 죽은 것일까. 그녀의 유서를 잘 들여다보면 답이 있다. 각종 질환으로 인한 수백 가지 통증이 원인이었다. 바늘로 찌르듯 쿡쿡 쑤셔대고,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욱신거리는 통증이 그녀를 옭아맸었다고 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 미칠 듯한 괴로움을 생각하면 나라도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만성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살을 생각한다고 한다. 말초신경 장애로 오는 CRPS(복합통증증후군) 환자 중 45%가 자살충동을 느끼고, 그 중 15%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다는 보고서도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나라의 통증을 다스리는 완화의료 수준은 아직 걸음마단계다. 보험료지원도 제대로 되지 않아 살이 찢겨나가는 통증에도 경제적 여유가 없다면 치료조차 받을 수 없는 실정이다. 사회가 이번 일을 계기로 이들을 돌보는 데 나서야한다.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지도 생각해보자. 존엄사 논란이 우리 사회를 뒤집어 놓았을 만큼 우리 사회에서 아직 죽을 권리를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하지만 편안히 죽을 권리를 찾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 자살보다야 그들에게 고통 없는 죽음을 선물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 낫다. 자살이 일으키는 사회적 부작용만 봐도 그렇다. 연예인의 자살을 보고 따라 죽는다는 ‘베르테르 효과’가 굳이 아니더라도 자살은 부정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지인의 자살은 그를 둘러싼 주위 6명에게 자살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보고서도 있지 않은가. 삶을 되돌아보고 깨끗하고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을 권리를 주는 제도를 우리 사회도 이제는 조심스럽게 고민해볼 때다.

그녀의 자살 소식을 듣고 나처럼 실망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배신감에 분노를 느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말 우리는 행복할 수 없는 가라는 철학적 물음에 자신을 파묻은 사람도 있을 지 모른다. 그래. 다 있을 수 있는 반응들이며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들이다. 하지만 단순히 행복전도사의 죽음을 개인적 감상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은 곤란하다. 이를 계기로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고통에 허우적거리며 삶의 의지를 놓으려는 사람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이것 역시 단순히 살펴보기만 해서는 안되고 이들을 위한 대책마련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행복한 사회는 거저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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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마마
2010/07/30 10:05 맛있는독서

[서평] 불편한 진실을 고발한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

"오늘 아침, 저는 여러분이 마실 급식 우유에 에이즈 감염 혈액을 넣었어요."

일본 S중학교, 1학년 B반 교실. 평화로운 종업식의 정적을 깨며 담임교사는 차분하게 자신의 범죄 사실을 고백한다. 교실은 동요하기 시작한다. 우유급식은 이미 끝난 상태다. 돌이킬 수 없다. 이 많은 우유 중 단 두 곳에만 에이즈 혈액을 넣었다는 담임. 학생 개개인의 이름이 적힌 우유팩이니 담임은 누군가를 해하기 위해 혈액을 주입했음이 틀림없다. 대체 왜. 사랑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야할 교사가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에이즈 혈액이 섞인 우유를 마신 학생 둘은 누굴까. 한 교사의 고백으로 시작된 미나토 가나에의 첫 장편소설 <고백>. 그녀의 충격적인 '고백'을 들어보자.

한때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열혈교사였지만 에이즈에 걸려버린 남편, 그 남편과 떨어져 살며 홀로 외동딸을 키운 이야기. 그 외동딸이 얼마 전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 수영장에 빠져 죽은 일들을 그녀는 차례차례 풀어놓는다. 더불어 딸의 죽음은 사고사가 아니었으며, 아이를 죽인 범인은 이 교실 안에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한다. 교사는 용의자를 A와 B로 묘사했지만, 그 반 학생들은 담임의 말만 듣고도 A와 B가 누군지 알 수 있다. 잔잔한 호숫가에 파문이 일 듯 학생들을 일렁이게 만든 교사는 고백을 마치고 학교를 떠난다.

과연 이 선생의 행동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할까. 딸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끝내 경찰에 용의자들을 고발하지 않은 그녀는 과연 옳은 것일까. 준엄한 사법절차에 따르기 보다는 스스로 심판자가 되고자 했던 그녀. 사실 그녀의 속사정은 따로 있었다.


 
미성년 범죄 연령제한, 이대로 괜찮은가요?

형사처벌 대상을 14세 이상으로 규정한 법이 문제였다. 아직 13세에 불과한 소년들을 재판정에 세워봤자 아무런 처벌을 내릴 수 없음은 물론, 그들은 끝끝내 반성조차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이런 생각이 그녀를 스스로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미성년 범죄가 점점 더 잔학해지는 요즘 우리 사회도 한번쯤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현재 우리나라 형사상 성년의 나이는 만 14세 이상이다. 똑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만 14세 이상과 미만은 처벌의 경중이 크게 달라진다. 이 책의 저자가 고발하고 싶은 현실이 바로 이것이다. 심신발달이 미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청소년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 사회 말이다. 큰 죄를 저지르고도 단지 어린 소년소녀라는 이유로 법적 제재를 받지 않는 작금의 상황은 과연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지난 4월 체코는 살인죄에 대한 형사책임 연령을 현행 15세에서 다섯 살 낮추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13세 소년이 같은 나이의 소녀를 강제로 성폭행·살해하고도, 형사상 미성년에 해당돼 청소년 교화시설에 수용됐다가 풀려난 일이 발단이었다. 체코 국민 중 40만 명은 이에 문제를 느끼고 형사 기소 가능 연령을 내려달라 정부에 청원했다. 정부는 이들 손을 들어주며 형사 처벌 가능연령을 10살로 내렸다.

몇몇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청소년들 사례를 들며 수많은 선량한 학생들까지 잠재적 범죄자로 내모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린 학생들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하거나 상해, 혹은 금전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작가도 이런 사회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백>의 여교사는 끝내 법을 초월한 나이의 제한을 부정했다. 스스로 우유에 에이즈 혈액을 섞어 범죄자들을 심판했다. 교사를 그만두고서도 끝끝내 A와 B의 파멸을 지켜보았다. 한 아이를 잃은 엄마라는 역할과 교사라는 사회적 지위 속에서 그녀는 철저히 '엄마'가 되고자 한 것이다. 윤리적 딜레마를 그녀는 단 한 번의 고민 없이 이겨냈다고도 볼 수 있다. 엄마에 무게를 싣고 그녀를 응원할지, 아니면 교사로서의 사명을 앞세우며 그녀를 비판할지는 독자의 몫이다.


'마녀사냥' 속 숨은 진실

작가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현대판 '마녀사냥'에도 일침을 가했다. 가해자 학생에 누군가 우유를 던지며 시작된 학생들의 광적인 심판을 보여주며 말이다. 작가는 작은 교실에서 벌어지는 이 모습을 그리며, 우리에게 심판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동시에 묻는다.

심판자가 될 자격, 우리에겐 과연 있을까. 책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현실에서도 어딘가 많이 본 장면이다. 벌써 오래 전 이야기가 된 '개똥녀 사건'이나 얼마 전 벌어진 '루저녀'사건 때도 우리 네티즌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에도 광적으로 우리 네티즌은 두 사람을 물어 뜯었다. 인신공격 정도를 넘어 개인의 신상 정보까지 낱낱이 인터넷에 공개했다. 과거 그들이 인터넷에 올렸던 글들이 수집돼 그들의 관심사나 감추고 싶던 과거들도 모조리 드러나게 됐다. 도덕적 비난을 살만했던 사건임은 분명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했을까란 의문이 남는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현대인들의 광적인 공격성향을 이렇게 분석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남에게 칭찬받고 싶다는 소망을 조금이라고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착한 일이나 훌륭한 행동을 하기란 힙듭니다. 그렇다면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질책하면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장 먼저 규탄하는 사람, 규탄의 선두에 서는 사람에겐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겠지요. 아무도 찬동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규탄하는 누군가를 따르기란 무척 쉽습니다. 자기 이념은 필요 없고, '나도, 나도'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니까요. 게다가 착한 일을 하면서 일상의 스트레스도 풀 수 있으니 최고의 쾌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한 번 그 쾌감을 맛보면 하나의 제재가 끝나도 새로운 쾌감을 얻고 싶어 다음번에 규탄할 상대를 찾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잔학한 악인을 규탄했지만, 점차 규탄 받아야 할 사람을 억지로 만들어내려 하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가 분명 곱씹어 볼 만한 분석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이렇게 마무리를 짓는다.

"이것은 중세 유럽의 마녀 재판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벌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을 처벌할 권리. 그들에게 손가락질 하고 그들의 삶을 짓밟을 심판자의 권리가 과연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퍼즐을 맞추듯 선명하게 그려지는 사건의 전말

작가가 우리 사회에 던진 화두는 이처럼 뜨거웠다.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방식도 보통 이상이었다. 여교사의 고백 일변도로 이어질 것 같았던 소설은 갈수록 기존 소설의 질서를 거부했다. '사고사로 위장된 살해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이 한 명 한 명 고백을 이어가는 구조다.

단지 어머니의 관심을 끌고 싶어 일을 저지른 소년 A. 패배의식에 찌들은 소년 B. 모든 상황을 아들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하려다 극한의 모정으로 치닫는 소년 B의 어머니. 전지전능한 입장에서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또 다른 학생 미즈키. 이들은 똑같은 사건을 바라보지만 생각과 입장은 전혀 다르다. 이들의 이야기는 퍼즐 조각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듯, 극 후반으로 갈수록 사건의 전말을 선명하게 만든다.

살아있는 듯 자연스럽고 생동감 넘치게 움직이는 캐릭터들도 이 책의 묘미다. 비결은 작가의 습관에 있다. 이 소설을 쓴 미나토 가나에는 집필 전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이력서를 작성해준다고 한다. 캐릭터의 성격을 세세하게 설정해 놓으면 등장인물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여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이 이유다. 이런 그녀의 고집은 작품 속 인물들이 자신들의 캐릭터를 뚜렷하게 가질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녀의 첫 장편 <고백>의 인물들이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이는 비결이다.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2008년 일본에서 출간된 후,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미스터리 소설 부문에서 여러 상을 휩쓸었는가 하면, 영화로도 제작됐다. 이 영화는 얼마 전 막을 내린 부천 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된 바 있다.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진 못했지만, 외면하고픈 사회의 추악한 부분을 담담하게 드러낸 그녀의 소설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덧붙여 작가는 마지막까지 독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복수란 무엇인가를 독자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주려는 듯이 말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복수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이 서평은 오마이뉴스에 송고했던 글임을 밝힙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22403&PAGE_CD=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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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마마
2010/07/26 14:08 내가본세상


사람이 사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추위와 더위를 막아줄 집과 옷도 물론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밥이 아닐까 싶다. 날씨가 우중충하거나 찌는 듯이 덥거나, 입을 옷이 없어 발가벗고 다니거나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도 밥을 먹지 않고서는 살기 힘들다. 밥은 우리의 삶에 이토록 중요하지만 우리는 이 밥의 중요성을 종종 잊고 산다. 동시에 밥 솥 운전대는 항상 엄마에게만 맡겨왔다.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얼마 전 엄마의 생신이 있었다. 나는 난생 처음 처음으로 생일상을 차려드렸다. 비루한 실력만큼이나 엄마의 생신상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짜디짠 미역국, 어딘가 엉성한 맛의 불고기. 나는 부끄러운 마음을 무릅쓰고 엄마를 식탁 앞으로 모셨다. 숟가락을 들기 전부터 엄마는 내게 고맙다는 말부터 하셨다. 이런 산해진미는 처음 먹어본다는 듯 엄마는 왕성한 식욕으로 식사를 마쳤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한 말씀 하셨다. “난 남이 해준 밥은 다 맛있더라”.

스스로 밥을 해먹고 해 먹이는 이 일이 얼마나 지겨우셨으면 저런 말씀을 하셨겠는가. 결혼 생활 25년 동안 죽으나 사나 식구들 밥 굶을까 밥을 해오시던 엄마가 아니었는가. 근데 비단 이런 생각을 가진 주부가 우리 엄마 뿐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들의 어머님들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아내를 얻는 다는 것은 ‘무급 가정부’를 얻는 것과 똑같다는 뭇 남성들의 실언이 떠올랐다. 우리 어머님들이 가정의 평화를 지킨다는 대의(大義)아래 그동안 얼마나 희생해 오셨던가. 콧날이 다 시큰해졌다.

백보 양보해서 우리 어머님 세대에는 그게 당연했던 일이라 치자.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한 지금은 그렇다면 어떨까. 아쉽게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 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맞벌이 남성의 가사노동시간은 42분으로 3시간 27분을 일하는 여성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이중에서도 남녀 차이가 가장 두드러진 부문은 음식준비였다.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밥을 먹는데도, 여자가 남자보다 1시간이나 더 밥 짓고 반찬 만드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거다.

남녀평등이 사회 많은 부문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하나, 아직 우리 주방까지 그 물결이 밀려들어오진 않은 것 같다. 사실 집에서 살림만 한다 해도 엄마도 피곤하다. 엄마도 가끔은 밥 짓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 엄마는 우리의 식사준비를 모조리 떠맡을 만큼 강하지 않다.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밥 짓는 일에서 엄마를 해방시켜드리자. 그것이 부족한 남편, 속 썩이는 자식의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는 길이다. 엄마는 ‘무급 식모’가 아니다.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gus0336?Redirect=Log&logNo=61329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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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마마
2010/07/23 21:27 내가본세상

                                                                            그림출처 : 한겨레

“준아!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엄마가 말했지?” “응? 어제 엄마도 아빠한테 거짓말 했잖아! 근데 왜 나만 하지 말래?” “그건 말이야.....” 할 말 없게 됐다. 자식 교육시키려다 되레 무안만 당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말 자체도 맞고 가르쳐야하는 것도 맞는데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원인은 말하는 사람에게 있다. 말하는 사람부터 제대로 지키지 않는 걸 누구에게 가르친단 말인가. 정치인들이 줄기차게 역설하는 ‘병역의무 이행’도 마찬가지다. 저들도 지키지 않는 것을 가지고 지키라마라 국민을 가르치고 있으니 그 말이 국민 입장에선 곧이 들릴 리 없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한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며, 아직 휴전 중인 국가이기 때문이다. 국방력이 우리나라에선 그만큼 중요하단 말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국방비 지출 국가이며,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징병제를 실시하는 것도 전력의 양과 질을 증강시키기 위해서다. 국가와 국민이 이렇게 국방에 돈과 시간을 쏟아 붓고 있는 이 시점에 군인들의 사기 진작은 반드시 같이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군인들의 사기는 곧 전투력과 직결되는 문제라서다.


전 국가적인 문제인 만큼 정치권이 나서 해결해야하지만 우리 정치권을 보면 한숨부터 먼저 나온다. 해결의지는 고사하고, 군복무의 당위를 말할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이 꽤나 많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처음 구성한 내각 조직에서 군 출신과 여성을 제외한 나머지 12명 중 5명이 병역 면제자였다고 한다. 이들의 면제율만 높은 것도 아니다. 이들의 자제들도 면제율이 41.7%에 달한다. 국민 평균 면제율 4.1%와 비교하면 거의 10배가 넘는 높은 수치다. 고위공직자라, 그들의 아들이라 군대에 못갈만한 특별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물론 지금 정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시국사건에 연루돼 복역을 했거나, 건강상 어쩔 수 없이 병역을 면제받은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들을 불법, 탈법으로 병역을 회피한 이들과 도매금으로 취급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도저도 아닌 의심스러운 사유로 병역을 면제 받은 고위 공직자들이 적지 않기에 그들 사회 전체를 비판하고자하는 것이다.


청운의 꿈을 안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2년이란 금쪽같은 시간을 국가에 바쳤거나 바칠 이들이 느낄 박탈감이 안쓰러워 이러는 거다. 돈이 없어서, 빽이 없어서 남들은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는 데 나만 그 일을 해야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요즘은 몸이 아파 공익근무로 대체 복무를 하는 사람들조차 ‘덜’ 힘들게 복무했다며 눈총을 받는 세상이다. 이런 분위기를 읽는다면 애초부터 병역의무를 지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 국가를 위하는 마음에서라도 공직에 진출하지 않는 것이 옳다.


국민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람들이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나서는 것조차 아이러니다. 국민 법 감정도 이를 거부한다. 병역면제자인 안상수, 이명박, 정운찬이 줄기차게 병역의 의무를 외치고, 준법정신을 가지라한들 국민들 귀에 들어오기나 하겠는가. 이제부터라도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은 사람들은 공직, 특히나 요직이라면 스스로 가지 않겠다 말하는 것이 국가를 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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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마마
2010/06/06 23:50 싱싱한영화

스토리도 그림도 평이했지만, 나와 닮은 주인공에게 끌렸다!   

일단 스토리 자체는 누구라도 예상이 가능할 만큼 평이했고 그림도 평범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내게도 중간 중간 지루한 부분이 있을 만큼 단조로웠던 영화였다. 그럼에도 내가 끝까지 이 영화를 본 이유는 순전히 나와 닮은 주인공의 모습 때문이다.


사실 그녀와 나는 얼굴도 키도 나이도 어느 것 하나 닮은 게 없었지만 무언가를 찾고자하는 의지만큼은 같았다. 내 안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 말이다. 우스운 말로 들리겠지만 이건 정말 굉장한 일이다. 힘든 일이기도 하다. 아무나 해 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내가 뭘 잘할 수 있을까를 찾아내고 확신하는 일.

일종의 성장통을 견뎌내고 까치발을 선 것만큼 성장하는 그 과정을 겪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는 기특하고 예뻐 보였다. 쑥스럽지만 이건 한 때의 그리고 현재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나와 닮은 그녀와 나는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했다.
 


평소 주인공 시즈쿠는 'Take me home country road'라는 곡을 개사해 친구들에게 보여준다. 친구들은 시즈쿠가 개사한 가사를 곡에 붙여 노래를 부르고 평가를 해준다. 이 대목에서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콘트리 로드를 콘크리트 로드로 부른다든지 하는 중학생 소녀의 치기어린 장난이 귀여워서다.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부는 한 명의 문학소녀는 그렇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짧은 가사나마 이리저리 바꿔가며 궁리하는 소녀에게도 사랑은 찾아왔다. 문학을 사랑하는 소녀에게 어울릴 법한 단정하고 다감한 소년이었다. 사랑에는 타이밍과 적지 않은 필연이 필요하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이 둘의 만남에도 필연은 존재했다. 소녀가 보는 책의 독서카드마다 소년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던 것. 소년은 오래전부터 소녀를 짝사랑하고 있었고, 그녀가 볼 만한 책을 먼저 빌려 독서카드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했다. 소년의 계획은 성공이었다. 독서카드에서 낯익은 이름이 수차례 반복되는 것을 보고 소녀는 마음속에 그를 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비슷한 책을 읽는, 자신의 취향과 비슷한 그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이런 인연을 계기로 둘은 만났고, 바이올린을 만드는 장인이 되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명하며 유럽으로 훌쩍 떠나버린 소년 때문에 소녀는 자신도 꿈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이 얼마나 바람직하며 생산적인 만남인가. 나는 이 대목에서 탄성을 터뜨렸다. 서로에게 멋진 사람이 되어주고 싶어 노력하는 이야기. 사랑은 비단 가슴 벅찬 따뜻함만을 주는 게 아니라, 멋진 사람이 되고자하는 자극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닥토닥 애정싸움하다 결국에는 서로의 가치를 깨달아 더욱 성숙한 사랑의 단계로 접어든다는 뻔한 이야기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귀를 기울이면’이 빛나 보이는 이유다.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난 소년을 기다리며 소녀는 펜촉을 가다듬는다. 소설쓰기라는 막막하고 두려운 일의 서막이었다. 고등학교 진학에 영향을 미치는 시험이 줄줄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 얼마간일까, 밥 먹는 것도 수업을 듣는 일도 하는 둥 마는 둥하며 그녀는 오로지 소설 집필에만 온 정신을 쏟았다. 엄청난 집중력이었다. 각고의 노력으로 태어난 그녀의 첫 작품은 소년의 할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읽혀졌다. 할아버지는 소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속에 들어있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을 발견했다” 소녀가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던 가능성을 검증받은 순간이었다. 아직은 서툴고, 거칠지만 다듬어지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찬란하게 빛날 가능성을 내재했다는 기쁨으로 소녀는 벅차올랐다. 덩달아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가슴도 뜨거워졌다. 옆에 있었다면 함께 손뼉을 치며 축하한다는 말을 연발했을 게다.



결국 예상대로 소년과 소녀는 다시 만났고, 미래를 약속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그 속에 성장통을 겪는 애니메이션이었다는 생각이다. 귀를 기울이면 이라는 제목 자체도 이 애니메이션이 던지려고 했던 메시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평소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자신만의 가능성에 귀를 기울이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우리는 흔히들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 지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타인에게 묻고 또 물으며 자신의 재능을 쉽게 발견하려고 한다. 감독은 이런 우리들에게 한 중학생 소녀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반성의 물꼬를 터준다. 내 안의 능력에 귀 기울이고, 내가 찾은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 치열하게 검증하고자 하는 소녀의 모습은 감독의 메시지를 던지기에 충분하기도 하다.  



‘귀를 기울이면’을 만든 콘도 요시후미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할까 한다. 콘도 감독은 우리나라의 현진건, 이상, 천상병 선생과 닮은 구석이 있다. 썩 유쾌한 공통점은 아니지만 요절했다는 사실이다. 좋은 시절은 빨리 가고, 예쁜 꽃은 쉬이 시들며, 좋은 사람은 일찍 간다는 옛 말이 새삼 떠오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수석제자이기도 했다는 콘도 감독에게 이 감상을 바친다.


* 2007년 11월 개봉한 전혀 싱싱하지 않은 영화를 일단 싱싱한 영화로 포장하여 올린 것에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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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마마
2010/05/19 15:13 맛있는독서



울지마라, 눈물이 네 몸을 녹일 것이니 - 이화경

죽을 둥 살 둥하며 힘겹게 보냈던 2009년 가을이었나. 그 당시의 나는 거의 패닉상태였던 것 같다. 누군가 바늘로 콕 찌르기만해도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던 그때. 할 일도 많고, 졸업은 코 앞인데 이놈의 언론계는 날 자꾸 밀쳐내기만 하고, 챙겨야 할 사람은 많고, 꼬박꼬박 오는 문자에 답장은 해줘야 하고, 글도 안써지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정말 말 그대로 살 맛이 안나던 그때였다.

이 책을 만나던 날도 기분이 상당히 별로였다. 수서과에 앉아 미처 채우지 못한 근로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저 죽었다 생각하고 자리에 앉아 새로 들어온 책에 쿵쿵 도장만 찍고 있었다. 이전같았으면 도장따위는 저리로 치워버리고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책이나 야금야금 봤을 내가 말이다. 기계처럼 한 참동안 등록작업을 하고 있던 찰나, 이 책이 눈에 띄었다. 푸른 바탕에 한껏 감상적인 제목을 그려넣은 이화경의 산문집. 인도여행기라는 말에 하던 일을 멈추고 책을 펼쳤다.

촤르륵. 책장을 몇 장 넘기니 이런 구절이 나왔다. '바쁜 생활을 피로를 낳고, 피로는 신경질을 낳고, 신경질은 무관심을 낳고, 무관심은 죄책감을 낳고, 죄책감은 우울을 낳고...... ' 이른바 '낳고 시리즈'. 하마터면 그 조용한 수서과에서 울뻔했다. 이거 내가 쓴 책 아니야?하며 다시 한 번 필자를 확인하기도 했다. 어쩜 이리 내 마음과 같을까.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나의 마음을 체에 걸러 글로 정리한 작가의 능력에 감탄을 보내며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메모장에 적어 놓았다.

메모장에 묵혀 둔지 몇 개월이 꼬박 지나서야 나는 책을 다시 찾았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이었지만, 다시 봐도 좋은 책이었다. 

류시화의 인도여행기가 '영적인 성숙'에 방점을 찍었다면,
이화경은 산문집은 있는 그대로의 인도에 '생활'을 발라두었다 말하고 싶다.


필자는 이년동안 인도 콜카타에 머무르며, 보고 느낀 것을 가감없이 책속에 풀어 놓았다. '사치와 허영을 허하라'는 발칙한 말까지 쓰여있으니 공자왈 맹자왈 재미없는 글은 아니란 이야기다. 

제법 생활을 발라둔 글이라 해서 '내가 가보니 인도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더라라고 쓰여져있다'는 건 아니다. 만약 그렇게 써있었다면 정말 꺅소리 났을거다. 엄청 실망했을 거다. 굳이 이렇게 길게 감상문을 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건 너무 원초적이며, 산문집이라는 이름이 아까운 책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산문은 가슴에 긴 여운을 남겨야만하는 글이다. 나의 알량한 기준으로 바라봤을 때 이 책은 충분히 합격점!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투씨 로마, 투씨 로마...

인상깊은 대목은 책 곳곳에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바로 여기다. '투씨 로마, 투씨 로마...' 사람이 죽었을 때 유가족이 부른다는 곡의 한 구절이다. 흡사 주문같기도 한 알 수 없는 이 말이 뭐 그렇게 인상에 남냐고? 뜻을 풀어보면 당신도 곧 그렇게 느끼게 될 것이다.

북인도 라다크에서 죽은 자를 화장하기 전 망자에게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를 읽어준다고 한다. 사전의 힘을 잠깐 빌리자. 티베트 사자의 서는 8세기 티베트불교의 대가 파드마삼바바가 티베트 산중에서 쓴 108개의 경전 중 하나로 후세 제자들이 찾아내어 남겼다는 전설의 경전이다. 원래 제목은 티베트어로 '바르도 퇴돌'이라고 한다. '바르도'란 '둘 사이'란 뜻으로 사람이 죽어서 다시 환생할 때까지의 중간 사이를 말한다. 이 상태에 머무는 기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49일로 알려져 있다. '퇴돌'이란 '듣는 것을 통한 영원한 해탈'이라는 뜻이다. 죽음의 순간 오직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삶과 죽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영원한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망자의 영혼이 극락정토에 다다르는 것을 안내하는 '티베트 사자의 서' 독경소리가 떠난 자의 집을 채울 때, 가족들은 애도의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한다. 그 곡소리가 '투씨 로마, 투씨 로마...'
우리 말로 풀이하면 '가을에 지는 잎새 같은, 시간의 잎새'라는 뜻이다. 아름답지 않은가. 인생을 그리고 죽음을 바라보는 그들의 은유적인 시선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삶을 성찰하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책은 문장이 특히나 좋다. 읽는 맛이 난다고나 할까. 드문드문 중복 표현이 있어 거슬리는 구석이 없진 않지만 조각같이 잘 빚어놓은 글이 참 보기 좋다.

'제가 십칠 년 동안 산 시골집 마당 한 구석엔 커다란 물앵두나무가 있었습니다. 이맘때쯤이면 통통히 물오른 앵두, 채 익지도 않은 그 앵두가 너무도 먹음직스러워 나무 아래를 한참이나 서성인 기억이 있습니다.'

글만 읽었을 뿐인데, 탱글탱글한 앵두가 벌써부터 머릿속에 그려진다. 입에는 상큼하고 시큼한 앵두 맛이 감도는 듯하다. 익지 않은 앵두를 바라보며 군침을 다시는 어린 소녀의 그림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참 맛있는 글이다.

그런가하면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에서의 사색'처럼 제법 자연묘사를 그럴 듯하게 하는 구절도 보인다. '어둠이 젖히고 보랏빛 섞인 진한 파란색 하늘이 드러나는 새벽녘을 매직 아워라고 한다지요. 하늘은 동 트는 빛으로 밝아오지만 땅은 먹물 빛으로 여전히 어두운 시간. 그 매직 아워에 역사밖 어슴푸레하던 낡은 건물과 사람들이 점점 제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을 보았어요' 참 아름다운 글이다. 글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배낭을 매고 낡고 거친 인도의 풍경을 바라보는 여행자가 된 것만 같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이는 오직 작가뿐이다. 작가 혼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주욱 늘어놓는다. 독자는 그저 그녀의 이야기를 몇시간이고 묵묵히 들어주는 입장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책을 덮고나면 마치 내가 그녀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인도여행을 한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묘한 느낌이다.

이 책 덕분에 인도로 배낭을 매고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나 더 커져버렸다. 누군가는 이 책에서 위로를 받는다고 한다. 따갑고 아픈 가슴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을 받는다고도 한다. 한때의 나도 그랬다. 그저 몇 줄을 읽었을 뿐인데,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따뜻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내게 이 책은 따뜻한 봄 날 한껏 부푼 가슴 속의 기운을 진정시켜주는 '진정제'다. 언제봐도 좋은 책.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을 기특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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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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