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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30 10:05 맛있는독서

[서평] 불편한 진실을 고발한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

"오늘 아침, 저는 여러분이 마실 급식 우유에 에이즈 감염 혈액을 넣었어요."

일본 S중학교, 1학년 B반 교실. 평화로운 종업식의 정적을 깨며 담임교사는 차분하게 자신의 범죄 사실을 고백한다. 교실은 동요하기 시작한다. 우유급식은 이미 끝난 상태다. 돌이킬 수 없다. 이 많은 우유 중 단 두 곳에만 에이즈 혈액을 넣었다는 담임. 학생 개개인의 이름이 적힌 우유팩이니 담임은 누군가를 해하기 위해 혈액을 주입했음이 틀림없다. 대체 왜. 사랑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야할 교사가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에이즈 혈액이 섞인 우유를 마신 학생 둘은 누굴까. 한 교사의 고백으로 시작된 미나토 가나에의 첫 장편소설 <고백>. 그녀의 충격적인 '고백'을 들어보자.

한때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열혈교사였지만 에이즈에 걸려버린 남편, 그 남편과 떨어져 살며 홀로 외동딸을 키운 이야기. 그 외동딸이 얼마 전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 수영장에 빠져 죽은 일들을 그녀는 차례차례 풀어놓는다. 더불어 딸의 죽음은 사고사가 아니었으며, 아이를 죽인 범인은 이 교실 안에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한다. 교사는 용의자를 A와 B로 묘사했지만, 그 반 학생들은 담임의 말만 듣고도 A와 B가 누군지 알 수 있다. 잔잔한 호숫가에 파문이 일 듯 학생들을 일렁이게 만든 교사는 고백을 마치고 학교를 떠난다.

과연 이 선생의 행동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할까. 딸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끝내 경찰에 용의자들을 고발하지 않은 그녀는 과연 옳은 것일까. 준엄한 사법절차에 따르기 보다는 스스로 심판자가 되고자 했던 그녀. 사실 그녀의 속사정은 따로 있었다.


 
미성년 범죄 연령제한, 이대로 괜찮은가요?

형사처벌 대상을 14세 이상으로 규정한 법이 문제였다. 아직 13세에 불과한 소년들을 재판정에 세워봤자 아무런 처벌을 내릴 수 없음은 물론, 그들은 끝끝내 반성조차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이런 생각이 그녀를 스스로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미성년 범죄가 점점 더 잔학해지는 요즘 우리 사회도 한번쯤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현재 우리나라 형사상 성년의 나이는 만 14세 이상이다. 똑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만 14세 이상과 미만은 처벌의 경중이 크게 달라진다. 이 책의 저자가 고발하고 싶은 현실이 바로 이것이다. 심신발달이 미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청소년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 사회 말이다. 큰 죄를 저지르고도 단지 어린 소년소녀라는 이유로 법적 제재를 받지 않는 작금의 상황은 과연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지난 4월 체코는 살인죄에 대한 형사책임 연령을 현행 15세에서 다섯 살 낮추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13세 소년이 같은 나이의 소녀를 강제로 성폭행·살해하고도, 형사상 미성년에 해당돼 청소년 교화시설에 수용됐다가 풀려난 일이 발단이었다. 체코 국민 중 40만 명은 이에 문제를 느끼고 형사 기소 가능 연령을 내려달라 정부에 청원했다. 정부는 이들 손을 들어주며 형사 처벌 가능연령을 10살로 내렸다.

몇몇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청소년들 사례를 들며 수많은 선량한 학생들까지 잠재적 범죄자로 내모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린 학생들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하거나 상해, 혹은 금전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작가도 이런 사회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백>의 여교사는 끝내 법을 초월한 나이의 제한을 부정했다. 스스로 우유에 에이즈 혈액을 섞어 범죄자들을 심판했다. 교사를 그만두고서도 끝끝내 A와 B의 파멸을 지켜보았다. 한 아이를 잃은 엄마라는 역할과 교사라는 사회적 지위 속에서 그녀는 철저히 '엄마'가 되고자 한 것이다. 윤리적 딜레마를 그녀는 단 한 번의 고민 없이 이겨냈다고도 볼 수 있다. 엄마에 무게를 싣고 그녀를 응원할지, 아니면 교사로서의 사명을 앞세우며 그녀를 비판할지는 독자의 몫이다.


'마녀사냥' 속 숨은 진실

작가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현대판 '마녀사냥'에도 일침을 가했다. 가해자 학생에 누군가 우유를 던지며 시작된 학생들의 광적인 심판을 보여주며 말이다. 작가는 작은 교실에서 벌어지는 이 모습을 그리며, 우리에게 심판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동시에 묻는다.

심판자가 될 자격, 우리에겐 과연 있을까. 책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현실에서도 어딘가 많이 본 장면이다. 벌써 오래 전 이야기가 된 '개똥녀 사건'이나 얼마 전 벌어진 '루저녀'사건 때도 우리 네티즌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에도 광적으로 우리 네티즌은 두 사람을 물어 뜯었다. 인신공격 정도를 넘어 개인의 신상 정보까지 낱낱이 인터넷에 공개했다. 과거 그들이 인터넷에 올렸던 글들이 수집돼 그들의 관심사나 감추고 싶던 과거들도 모조리 드러나게 됐다. 도덕적 비난을 살만했던 사건임은 분명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했을까란 의문이 남는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현대인들의 광적인 공격성향을 이렇게 분석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남에게 칭찬받고 싶다는 소망을 조금이라고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착한 일이나 훌륭한 행동을 하기란 힙듭니다. 그렇다면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질책하면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장 먼저 규탄하는 사람, 규탄의 선두에 서는 사람에겐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겠지요. 아무도 찬동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규탄하는 누군가를 따르기란 무척 쉽습니다. 자기 이념은 필요 없고, '나도, 나도'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니까요. 게다가 착한 일을 하면서 일상의 스트레스도 풀 수 있으니 최고의 쾌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한 번 그 쾌감을 맛보면 하나의 제재가 끝나도 새로운 쾌감을 얻고 싶어 다음번에 규탄할 상대를 찾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잔학한 악인을 규탄했지만, 점차 규탄 받아야 할 사람을 억지로 만들어내려 하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가 분명 곱씹어 볼 만한 분석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이렇게 마무리를 짓는다.

"이것은 중세 유럽의 마녀 재판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벌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을 처벌할 권리. 그들에게 손가락질 하고 그들의 삶을 짓밟을 심판자의 권리가 과연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퍼즐을 맞추듯 선명하게 그려지는 사건의 전말

작가가 우리 사회에 던진 화두는 이처럼 뜨거웠다.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방식도 보통 이상이었다. 여교사의 고백 일변도로 이어질 것 같았던 소설은 갈수록 기존 소설의 질서를 거부했다. '사고사로 위장된 살해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이 한 명 한 명 고백을 이어가는 구조다.

단지 어머니의 관심을 끌고 싶어 일을 저지른 소년 A. 패배의식에 찌들은 소년 B. 모든 상황을 아들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하려다 극한의 모정으로 치닫는 소년 B의 어머니. 전지전능한 입장에서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또 다른 학생 미즈키. 이들은 똑같은 사건을 바라보지만 생각과 입장은 전혀 다르다. 이들의 이야기는 퍼즐 조각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듯, 극 후반으로 갈수록 사건의 전말을 선명하게 만든다.

살아있는 듯 자연스럽고 생동감 넘치게 움직이는 캐릭터들도 이 책의 묘미다. 비결은 작가의 습관에 있다. 이 소설을 쓴 미나토 가나에는 집필 전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이력서를 작성해준다고 한다. 캐릭터의 성격을 세세하게 설정해 놓으면 등장인물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여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이 이유다. 이런 그녀의 고집은 작품 속 인물들이 자신들의 캐릭터를 뚜렷하게 가질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녀의 첫 장편 <고백>의 인물들이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이는 비결이다.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2008년 일본에서 출간된 후,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미스터리 소설 부문에서 여러 상을 휩쓸었는가 하면, 영화로도 제작됐다. 이 영화는 얼마 전 막을 내린 부천 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된 바 있다.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진 못했지만, 외면하고픈 사회의 추악한 부분을 담담하게 드러낸 그녀의 소설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덧붙여 작가는 마지막까지 독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복수란 무엇인가를 독자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주려는 듯이 말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복수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이 서평은 오마이뉴스에 송고했던 글임을 밝힙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22403&PAGE_CD=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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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마마
2010/07/26 14:08 내가본세상


사람이 사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추위와 더위를 막아줄 집과 옷도 물론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밥이 아닐까 싶다. 날씨가 우중충하거나 찌는 듯이 덥거나, 입을 옷이 없어 발가벗고 다니거나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도 밥을 먹지 않고서는 살기 힘들다. 밥은 우리의 삶에 이토록 중요하지만 우리는 이 밥의 중요성을 종종 잊고 산다. 동시에 밥 솥 운전대는 항상 엄마에게만 맡겨왔다.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얼마 전 엄마의 생신이 있었다. 나는 난생 처음 처음으로 생일상을 차려드렸다. 비루한 실력만큼이나 엄마의 생신상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짜디짠 미역국, 어딘가 엉성한 맛의 불고기. 나는 부끄러운 마음을 무릅쓰고 엄마를 식탁 앞으로 모셨다. 숟가락을 들기 전부터 엄마는 내게 고맙다는 말부터 하셨다. 이런 산해진미는 처음 먹어본다는 듯 엄마는 왕성한 식욕으로 식사를 마쳤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한 말씀 하셨다. “난 남이 해준 밥은 다 맛있더라”.

스스로 밥을 해먹고 해 먹이는 이 일이 얼마나 지겨우셨으면 저런 말씀을 하셨겠는가. 결혼 생활 25년 동안 죽으나 사나 식구들 밥 굶을까 밥을 해오시던 엄마가 아니었는가. 근데 비단 이런 생각을 가진 주부가 우리 엄마 뿐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들의 어머님들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아내를 얻는 다는 것은 ‘무급 가정부’를 얻는 것과 똑같다는 뭇 남성들의 실언이 떠올랐다. 우리 어머님들이 가정의 평화를 지킨다는 대의(大義)아래 그동안 얼마나 희생해 오셨던가. 콧날이 다 시큰해졌다.

백보 양보해서 우리 어머님 세대에는 그게 당연했던 일이라 치자.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한 지금은 그렇다면 어떨까. 아쉽게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 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맞벌이 남성의 가사노동시간은 42분으로 3시간 27분을 일하는 여성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이중에서도 남녀 차이가 가장 두드러진 부문은 음식준비였다.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밥을 먹는데도, 여자가 남자보다 1시간이나 더 밥 짓고 반찬 만드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거다.

남녀평등이 사회 많은 부문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하나, 아직 우리 주방까지 그 물결이 밀려들어오진 않은 것 같다. 사실 집에서 살림만 한다 해도 엄마도 피곤하다. 엄마도 가끔은 밥 짓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 엄마는 우리의 식사준비를 모조리 떠맡을 만큼 강하지 않다.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밥 짓는 일에서 엄마를 해방시켜드리자. 그것이 부족한 남편, 속 썩이는 자식의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는 길이다. 엄마는 ‘무급 식모’가 아니다.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gus0336?Redirect=Log&logNo=61329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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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마마
2010/07/23 21:27 내가본세상

                                                                            그림출처 : 한겨레

“준아!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엄마가 말했지?” “응? 어제 엄마도 아빠한테 거짓말 했잖아! 근데 왜 나만 하지 말래?” “그건 말이야.....” 할 말 없게 됐다. 자식 교육시키려다 되레 무안만 당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말 자체도 맞고 가르쳐야하는 것도 맞는데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원인은 말하는 사람에게 있다. 말하는 사람부터 제대로 지키지 않는 걸 누구에게 가르친단 말인가. 정치인들이 줄기차게 역설하는 ‘병역의무 이행’도 마찬가지다. 저들도 지키지 않는 것을 가지고 지키라마라 국민을 가르치고 있으니 그 말이 국민 입장에선 곧이 들릴 리 없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한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며, 아직 휴전 중인 국가이기 때문이다. 국방력이 우리나라에선 그만큼 중요하단 말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국방비 지출 국가이며,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징병제를 실시하는 것도 전력의 양과 질을 증강시키기 위해서다. 국가와 국민이 이렇게 국방에 돈과 시간을 쏟아 붓고 있는 이 시점에 군인들의 사기 진작은 반드시 같이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군인들의 사기는 곧 전투력과 직결되는 문제라서다.


전 국가적인 문제인 만큼 정치권이 나서 해결해야하지만 우리 정치권을 보면 한숨부터 먼저 나온다. 해결의지는 고사하고, 군복무의 당위를 말할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이 꽤나 많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처음 구성한 내각 조직에서 군 출신과 여성을 제외한 나머지 12명 중 5명이 병역 면제자였다고 한다. 이들의 면제율만 높은 것도 아니다. 이들의 자제들도 면제율이 41.7%에 달한다. 국민 평균 면제율 4.1%와 비교하면 거의 10배가 넘는 높은 수치다. 고위공직자라, 그들의 아들이라 군대에 못갈만한 특별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물론 지금 정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시국사건에 연루돼 복역을 했거나, 건강상 어쩔 수 없이 병역을 면제받은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들을 불법, 탈법으로 병역을 회피한 이들과 도매금으로 취급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도저도 아닌 의심스러운 사유로 병역을 면제 받은 고위 공직자들이 적지 않기에 그들 사회 전체를 비판하고자하는 것이다.


청운의 꿈을 안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2년이란 금쪽같은 시간을 국가에 바쳤거나 바칠 이들이 느낄 박탈감이 안쓰러워 이러는 거다. 돈이 없어서, 빽이 없어서 남들은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는 데 나만 그 일을 해야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요즘은 몸이 아파 공익근무로 대체 복무를 하는 사람들조차 ‘덜’ 힘들게 복무했다며 눈총을 받는 세상이다. 이런 분위기를 읽는다면 애초부터 병역의무를 지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 국가를 위하는 마음에서라도 공직에 진출하지 않는 것이 옳다.


국민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람들이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나서는 것조차 아이러니다. 국민 법 감정도 이를 거부한다. 병역면제자인 안상수, 이명박, 정운찬이 줄기차게 병역의 의무를 외치고, 준법정신을 가지라한들 국민들 귀에 들어오기나 하겠는가. 이제부터라도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은 사람들은 공직, 특히나 요직이라면 스스로 가지 않겠다 말하는 것이 국가를 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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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마마
2010/06/06 23:50 싱싱한영화

스토리도 그림도 평이했지만, 나와 닮은 주인공에게 끌렸다!   

일단 스토리 자체는 누구라도 예상이 가능할 만큼 평이했고 그림도 평범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내게도 중간 중간 지루한 부분이 있을 만큼 단조로웠던 영화였다. 그럼에도 내가 끝까지 이 영화를 본 이유는 순전히 나와 닮은 주인공의 모습 때문이다.


사실 그녀와 나는 얼굴도 키도 나이도 어느 것 하나 닮은 게 없었지만 무언가를 찾고자하는 의지만큼은 같았다. 내 안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 말이다. 우스운 말로 들리겠지만 이건 정말 굉장한 일이다. 힘든 일이기도 하다. 아무나 해 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내가 뭘 잘할 수 있을까를 찾아내고 확신하는 일.

일종의 성장통을 견뎌내고 까치발을 선 것만큼 성장하는 그 과정을 겪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는 기특하고 예뻐 보였다. 쑥스럽지만 이건 한 때의 그리고 현재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나와 닮은 그녀와 나는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했다.
 


평소 주인공 시즈쿠는 'Take me home country road'라는 곡을 개사해 친구들에게 보여준다. 친구들은 시즈쿠가 개사한 가사를 곡에 붙여 노래를 부르고 평가를 해준다. 이 대목에서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콘트리 로드를 콘크리트 로드로 부른다든지 하는 중학생 소녀의 치기어린 장난이 귀여워서다.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부는 한 명의 문학소녀는 그렇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짧은 가사나마 이리저리 바꿔가며 궁리하는 소녀에게도 사랑은 찾아왔다. 문학을 사랑하는 소녀에게 어울릴 법한 단정하고 다감한 소년이었다. 사랑에는 타이밍과 적지 않은 필연이 필요하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이 둘의 만남에도 필연은 존재했다. 소녀가 보는 책의 독서카드마다 소년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던 것. 소년은 오래전부터 소녀를 짝사랑하고 있었고, 그녀가 볼 만한 책을 먼저 빌려 독서카드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했다. 소년의 계획은 성공이었다. 독서카드에서 낯익은 이름이 수차례 반복되는 것을 보고 소녀는 마음속에 그를 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비슷한 책을 읽는, 자신의 취향과 비슷한 그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이런 인연을 계기로 둘은 만났고, 바이올린을 만드는 장인이 되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명하며 유럽으로 훌쩍 떠나버린 소년 때문에 소녀는 자신도 꿈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이 얼마나 바람직하며 생산적인 만남인가. 나는 이 대목에서 탄성을 터뜨렸다. 서로에게 멋진 사람이 되어주고 싶어 노력하는 이야기. 사랑은 비단 가슴 벅찬 따뜻함만을 주는 게 아니라, 멋진 사람이 되고자하는 자극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닥토닥 애정싸움하다 결국에는 서로의 가치를 깨달아 더욱 성숙한 사랑의 단계로 접어든다는 뻔한 이야기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귀를 기울이면’이 빛나 보이는 이유다.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난 소년을 기다리며 소녀는 펜촉을 가다듬는다. 소설쓰기라는 막막하고 두려운 일의 서막이었다. 고등학교 진학에 영향을 미치는 시험이 줄줄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 얼마간일까, 밥 먹는 것도 수업을 듣는 일도 하는 둥 마는 둥하며 그녀는 오로지 소설 집필에만 온 정신을 쏟았다. 엄청난 집중력이었다. 각고의 노력으로 태어난 그녀의 첫 작품은 소년의 할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읽혀졌다. 할아버지는 소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속에 들어있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을 발견했다” 소녀가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던 가능성을 검증받은 순간이었다. 아직은 서툴고, 거칠지만 다듬어지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찬란하게 빛날 가능성을 내재했다는 기쁨으로 소녀는 벅차올랐다. 덩달아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가슴도 뜨거워졌다. 옆에 있었다면 함께 손뼉을 치며 축하한다는 말을 연발했을 게다.



결국 예상대로 소년과 소녀는 다시 만났고, 미래를 약속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그 속에 성장통을 겪는 애니메이션이었다는 생각이다. 귀를 기울이면 이라는 제목 자체도 이 애니메이션이 던지려고 했던 메시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평소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자신만의 가능성에 귀를 기울이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우리는 흔히들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 지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타인에게 묻고 또 물으며 자신의 재능을 쉽게 발견하려고 한다. 감독은 이런 우리들에게 한 중학생 소녀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반성의 물꼬를 터준다. 내 안의 능력에 귀 기울이고, 내가 찾은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 치열하게 검증하고자 하는 소녀의 모습은 감독의 메시지를 던지기에 충분하기도 하다.  



‘귀를 기울이면’을 만든 콘도 요시후미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할까 한다. 콘도 감독은 우리나라의 현진건, 이상, 천상병 선생과 닮은 구석이 있다. 썩 유쾌한 공통점은 아니지만 요절했다는 사실이다. 좋은 시절은 빨리 가고, 예쁜 꽃은 쉬이 시들며, 좋은 사람은 일찍 간다는 옛 말이 새삼 떠오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수석제자이기도 했다는 콘도 감독에게 이 감상을 바친다.


* 2007년 11월 개봉한 전혀 싱싱하지 않은 영화를 일단 싱싱한 영화로 포장하여 올린 것에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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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마마
2010/05/19 15:13 맛있는독서



울지마라, 눈물이 네 몸을 녹일 것이니 - 이화경

죽을 둥 살 둥하며 힘겹게 보냈던 2009년 가을이었나. 그 당시의 나는 거의 패닉상태였던 것 같다. 누군가 바늘로 콕 찌르기만해도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던 그때. 할 일도 많고, 졸업은 코 앞인데 이놈의 언론계는 날 자꾸 밀쳐내기만 하고, 챙겨야 할 사람은 많고, 꼬박꼬박 오는 문자에 답장은 해줘야 하고, 글도 안써지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정말 말 그대로 살 맛이 안나던 그때였다.

이 책을 만나던 날도 기분이 상당히 별로였다. 수서과에 앉아 미처 채우지 못한 근로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저 죽었다 생각하고 자리에 앉아 새로 들어온 책에 쿵쿵 도장만 찍고 있었다. 이전같았으면 도장따위는 저리로 치워버리고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책이나 야금야금 봤을 내가 말이다. 기계처럼 한 참동안 등록작업을 하고 있던 찰나, 이 책이 눈에 띄었다. 푸른 바탕에 한껏 감상적인 제목을 그려넣은 이화경의 산문집. 인도여행기라는 말에 하던 일을 멈추고 책을 펼쳤다.

촤르륵. 책장을 몇 장 넘기니 이런 구절이 나왔다. '바쁜 생활을 피로를 낳고, 피로는 신경질을 낳고, 신경질은 무관심을 낳고, 무관심은 죄책감을 낳고, 죄책감은 우울을 낳고...... ' 이른바 '낳고 시리즈'. 하마터면 그 조용한 수서과에서 울뻔했다. 이거 내가 쓴 책 아니야?하며 다시 한 번 필자를 확인하기도 했다. 어쩜 이리 내 마음과 같을까.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나의 마음을 체에 걸러 글로 정리한 작가의 능력에 감탄을 보내며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메모장에 적어 놓았다.

메모장에 묵혀 둔지 몇 개월이 꼬박 지나서야 나는 책을 다시 찾았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이었지만, 다시 봐도 좋은 책이었다. 

류시화의 인도여행기가 '영적인 성숙'에 방점을 찍었다면,
이화경은 산문집은 있는 그대로의 인도에 '생활'을 발라두었다 말하고 싶다.


필자는 이년동안 인도 콜카타에 머무르며, 보고 느낀 것을 가감없이 책속에 풀어 놓았다. '사치와 허영을 허하라'는 발칙한 말까지 쓰여있으니 공자왈 맹자왈 재미없는 글은 아니란 이야기다. 

제법 생활을 발라둔 글이라 해서 '내가 가보니 인도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더라라고 쓰여져있다'는 건 아니다. 만약 그렇게 써있었다면 정말 꺅소리 났을거다. 엄청 실망했을 거다. 굳이 이렇게 길게 감상문을 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건 너무 원초적이며, 산문집이라는 이름이 아까운 책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산문은 가슴에 긴 여운을 남겨야만하는 글이다. 나의 알량한 기준으로 바라봤을 때 이 책은 충분히 합격점!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투씨 로마, 투씨 로마...

인상깊은 대목은 책 곳곳에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바로 여기다. '투씨 로마, 투씨 로마...' 사람이 죽었을 때 유가족이 부른다는 곡의 한 구절이다. 흡사 주문같기도 한 알 수 없는 이 말이 뭐 그렇게 인상에 남냐고? 뜻을 풀어보면 당신도 곧 그렇게 느끼게 될 것이다.

북인도 라다크에서 죽은 자를 화장하기 전 망자에게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를 읽어준다고 한다. 사전의 힘을 잠깐 빌리자. 티베트 사자의 서는 8세기 티베트불교의 대가 파드마삼바바가 티베트 산중에서 쓴 108개의 경전 중 하나로 후세 제자들이 찾아내어 남겼다는 전설의 경전이다. 원래 제목은 티베트어로 '바르도 퇴돌'이라고 한다. '바르도'란 '둘 사이'란 뜻으로 사람이 죽어서 다시 환생할 때까지의 중간 사이를 말한다. 이 상태에 머무는 기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49일로 알려져 있다. '퇴돌'이란 '듣는 것을 통한 영원한 해탈'이라는 뜻이다. 죽음의 순간 오직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삶과 죽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영원한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망자의 영혼이 극락정토에 다다르는 것을 안내하는 '티베트 사자의 서' 독경소리가 떠난 자의 집을 채울 때, 가족들은 애도의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한다. 그 곡소리가 '투씨 로마, 투씨 로마...'
우리 말로 풀이하면 '가을에 지는 잎새 같은, 시간의 잎새'라는 뜻이다. 아름답지 않은가. 인생을 그리고 죽음을 바라보는 그들의 은유적인 시선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삶을 성찰하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책은 문장이 특히나 좋다. 읽는 맛이 난다고나 할까. 드문드문 중복 표현이 있어 거슬리는 구석이 없진 않지만 조각같이 잘 빚어놓은 글이 참 보기 좋다.

'제가 십칠 년 동안 산 시골집 마당 한 구석엔 커다란 물앵두나무가 있었습니다. 이맘때쯤이면 통통히 물오른 앵두, 채 익지도 않은 그 앵두가 너무도 먹음직스러워 나무 아래를 한참이나 서성인 기억이 있습니다.'

글만 읽었을 뿐인데, 탱글탱글한 앵두가 벌써부터 머릿속에 그려진다. 입에는 상큼하고 시큼한 앵두 맛이 감도는 듯하다. 익지 않은 앵두를 바라보며 군침을 다시는 어린 소녀의 그림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참 맛있는 글이다.

그런가하면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에서의 사색'처럼 제법 자연묘사를 그럴 듯하게 하는 구절도 보인다. '어둠이 젖히고 보랏빛 섞인 진한 파란색 하늘이 드러나는 새벽녘을 매직 아워라고 한다지요. 하늘은 동 트는 빛으로 밝아오지만 땅은 먹물 빛으로 여전히 어두운 시간. 그 매직 아워에 역사밖 어슴푸레하던 낡은 건물과 사람들이 점점 제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을 보았어요' 참 아름다운 글이다. 글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배낭을 매고 낡고 거친 인도의 풍경을 바라보는 여행자가 된 것만 같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이는 오직 작가뿐이다. 작가 혼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주욱 늘어놓는다. 독자는 그저 그녀의 이야기를 몇시간이고 묵묵히 들어주는 입장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책을 덮고나면 마치 내가 그녀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인도여행을 한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묘한 느낌이다.

이 책 덕분에 인도로 배낭을 매고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나 더 커져버렸다. 누군가는 이 책에서 위로를 받는다고 한다. 따갑고 아픈 가슴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을 받는다고도 한다. 한때의 나도 그랬다. 그저 몇 줄을 읽었을 뿐인데,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따뜻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내게 이 책은 따뜻한 봄 날 한껏 부푼 가슴 속의 기운을 진정시켜주는 '진정제'다. 언제봐도 좋은 책.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을 기특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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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7 13:27 내가본세상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

가히 ‘조전혁의 난’이라 할만하다.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이 전교조 명단을 공개한 이후의 상황 말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명단을 확인하기위해 조 의원 홈페이지에 몰려들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접속해 서버는 마비상태였다. 법원은 공개금지 판결을 거스른 조 의원에게 계속 명단을 공개할 시 하루 3천만 원씩 전교조에 배상하라고 압박했다. 막대한 벌금으로 결국 조의원의 반란(?)은 나흘 만에 막을 내렸지만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전교조 명단 공개와 그 과정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하는 것일까.

전교조 교사들의 명단을 공개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에 대해 학부모들과 아이들은 알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념적으로나 인성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어린 아이들은 백지와 같다. 무엇이든 잘 받아들인다. 그래서 위험하다. 일부 급진적 이념성향을 가진 전교조교사들이 우리 아이를 가르친다면 우리 아이가 호도될 위험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교육이라는 국민의 의무를 행하는 과정에서 이런 부작용이 우려된다면 사전에 이를 최소한 알권리가 학부모와 학생에게 있지 않을까. 서비스를 구매할 때도 요즘은 서비스 제공자의 이름과 경력을 쉽게 알 수 있다. 교사도 교육서비스 제공자다. 교육서비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교사의 노조가입정보를 교육서비스 구매자인 학생과 학부모는 알권리가 있다.


진짜 우리가 문제삼아야할 부분은 명단공개 ‘과정’이다. 법을 거스르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서울 남부지법은 조 의원에게 명단을 공개하지 말라고 했다. 법치국가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아무리 취지가 좋더라도 당연히 이를 따랐어야 했다. 이는 초등학생도 알만한 상식이었지만 조 의원은 명단공개를 강행했다. 법을 만들고 이를 수호해야할 국회의원이 법원의 판결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명단 공개의 옳고 그름을 떠난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명단을 공개한 행동은 분명 문제다.


조 의원에게 내려진 판결은 심지어 재심의 여지도 있었다. 남부지법 판결은 고작 1심이었기 때문이다. 1심 판결을 납득하기 힘들었다면 고등법원․대법원에서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의논해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상황이 이럼에도 조 의원은 주변에 포진한 몇몇 법률가들의 이야기만 듣고 섣불리 명단공개를 강행했다. 이는 세 번 까지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거부한 것이며, 심하게 말하면 사법시스템의 근간인 법치주의를 부정한 행동이다. 모든 사람이 조 의원처럼 법원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그림이 그려진다.


전교조 명단을 공개해 학부모와 학생의 알권리를 지켜준다는 취지는 좋았다. 하지만 아무리 취지가 좋더라도 절차에 문제가 있다면 이는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기 힘들다. 마치 배고픈 조카들에게 먹을거리를 주기위해 빵을 훔친 장발장처럼 말이다. ‘조의원의 난’은 앞서 말한 대로 나흘 만에 막을 내렸지만, 다음번에는 이런 초법적인 행위로 부러 욕을 먹는 일은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 조전혁 의원의 이번 행동을 혁명이 아닌 ‘난’으로밖에 정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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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마마
2010/03/25 22:36 소소한일상

인도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내가 참 좋아하는 영화다.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본 반지의 제왕만큼은 아니지만 말이다. 웬만하면 영화를 보고도 본 걸로 만족하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내가 영화리뷰를 썼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쓴 리뷰까지 찾아 읽을 정도였다. 영화광도 아니고 사실 영화에 별 관심이 없는지라 씨네 21 등과 같은 잡지에서 본 것은 물론 아니다. 그저 네티즌들이 끄적인 블로그 한 귀퉁이 글을 읽었다.

내용은 다 비슷했다. 어떤이는 스토리를 나열했고, 어떤이는 이 영화만의 독특한 장치에 주목했다. 겉멋 잔뜩 들려 영화를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주인공에 초점을 맞춘 내 글도 그들의 글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 내게 오늘 본 리뷰는 새삼스러웠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한 사람의 싸이월드에서 본 내용이다. 싸이월드에 얼마나 깊이있는 이야기를 썼겠냐 싶지만 이 사람은 좀 달랐다. 이해할 수도 없고, 살짝 난해하기까지한 리뷰였다. 리뷰를 쓰다가 갑자기 인생을 논하는 삼천포로도 빠졌다. -지금 내가 쓰는 글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거두절미하고 그 분이 쓰신 리뷰 내용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줄은 영화가 '퀴즈를 풀어 얻어내는 상금의 달콤함으로 사회 저변의 빈민과 부패를 가린다'였다.

영화의 독특한 장치에만 주목할 줄 알았지, 이런 생각은 해 본적이 없었다. 물론 인도의 슬럼가 풍경이나 앵벌이 정도는 생각해봤다. 다만 내가 놀란 것은 영화가 판타지로 가려놓은 현실을 너무나 잘 짚었다는 점이다. 이 분도 후에 고백한다. 자기도 영화잡지에서 본 내용이라고. 속았지만 그래도 좋은 텍스트를 찾아내는 그의 안목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른 글도 많았다. 기쿠지로의 여름 감상문도 있었다. 기쿠지로의 여름. 이 영화도 몇 번 봤다. 질리지 않는 영화다. 누군가 내 옆에서 그 영화를 본 다면 또 볼 용의가 있다. 그 정도다. 곳곳에 숨겨진 웃음 주머니들이 터질 때마다 나는 아직도 웃는다. 소소하면서 한 편으로는 눈물 찔끔나는 이야기가 함께하는 영화. 아, 영화 감상문을 쓰려던게 아니었다. 어쨌든 그이의 글에서 나와 같은 성향을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

기타노 타케시 감독을 좋아한다는 말. 단순히 좋아한 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아서 더 좋았다. 좋아하긴 하는 데 그게 왜 좋은건지, 관성인지 아니면 정말 보고 있으면 즐겁고 행복해서 좋은건지. 그는 왜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졌다. 자기 자신을 탐구한다는 느낌이랄까.

더 구미가 당기는 것은 왜!라는 질문조차 가만히 놔두지 않는 다는 거다. 필자는 왜!라는 질문이 상당히 선진화 된 질문이라는 내용이라 주장하면서, 그게 또 왜! 그런 것인지 설명한다. 그리 긴 설명은 아니었으나 대충 이해가 됐다.

간단히 이야기 해보자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예전에 특히나 5공 시절, 아니 그 전부터 한국의 문화가 왜!라는 물음을 용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가호호마다야 그랬겠냐만은 통수권자와 함께하는 큰집만큼은 적어도 그랬을 것이다. 각하께서 까라면 두말없이 까는 문화가 어디서 나왔겠는가. 그때 누군가 왜요! 라고 대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재미있는 상상이다. 아마 첫번째 반응은 어이없다!가 아니었을까. 요즘말로 하면 개념이 없다, 그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두번째로는 삼청동 어디론가로 끌려가서 정신 교육을 단단히 받았지 않았을까.

물론 충신 혹은 가신들은 물음을 던졌을 수도 있겠다. 감히. 하지만 나머지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나. 허나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 문화가 필시 군사정권 하에서만 나왔다고 보기도 어렵겠다.
 
유교적 관념을 이어받아온 우리네 가풍부터도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지 않았겠나 싶다. 할아버지 말꼬리를 잡았다가는 버릇없는 놈 취급 당하기 십상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옮겨적다보니 왜!라는 질문이 우리나라에서 왜! 선진화된 질문인지에 대한 의문은 해소됐다. 이런 생각거리들은 참 좋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생각해보는 연습을 하면 사고력이 높아진다고 들었다. -게임처럼 경험치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니 확인할 방도는 없다- 한 발 빼자면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뜩이나 깊이 생각해보고 걸 귀찮아하니 이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꼬리잡기를 해봐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동안은 너무 직관에 의존한 삶을 살지 않았나 싶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았단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생각하기 귀찮으니까 간단하게 생각하고 내 맘대로 결론짓고 넘어갔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는 좀 후회가 된다. 그때부터 차곡차곡 내공을 쌓았더라면 지금의 내 모습이 조금 달라져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는 연습을 해야겠다. 앞으로 조금 더 머리가 복잡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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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마마
2010/03/15 11:53 싱싱한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조니 뎁과 팀 버튼의 합작으로 개봉 초기부터 관심을 끌었다.
타이틀 만으로도 8-9천원의 티켓 값을 기꺼이 치르게 만드는 영화였다.

사실 경기도 어렵고, 내 주머니는 더 어려운 현실에 요즘 영화티켓 값은 정말 만만치 않다.
상황은 이렇듯 씁쓸(?)했지만 오랜만에 아무 생각없이 오락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딱히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독서는 시들시들해졌다. 색다른 자극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현실을 잊고 환상적인 세계에서 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 영화는 내게 안성맞춤이었다.   


이전 '찰리와 초콜릿 공장'서 뎁과 버튼 오라버니들께서 보여줬던 기막힌 앙상블이 뇌리에 남아있기도 했다. 사설이 길어졌다. 여튼 이런 사정으로 나는 이상한 나라 행 티켓을 끊었다.



1시간 40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동안 그들이 보여준 볼거리는 과연 화려했다.
영상이 우선 그랬다. 어느 영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강렬한 원색의 향연이었다.



미친 모자장수를 열연한 조니 뎁의 주황색 머리. 시시각각 변하는 모자장수의 눈 색깔.

붉은 여왕과 하얀 여왕의 색 대비. 특히나 붉은 여왕의 입술은 눈길을 사로잡았다.
창백한 입술에 강렬한 빨간 색 립스틱이 하트 모양으로 그려져있기 때문이다.
붉은 여왕의 촌스러운 듯하면서도 도전적인 아이섀도우도 뇌리에 남는 색이다. 


무채색이 가득한 세계에서 살다 컬러풀한 색상의 세계로 들어가니 눈은 즐거웠다.
오히려 너무 화려하고 자극적인 면이 많아 어지럽기까지 했다.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이 영화의 퀄리티를 격하게 낮추는 면은 '스토리 전개'다.
한 마디로 '뻔할 뻔'자다.
원작을 충실히 살렸다고 볼 수도 있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앞에 전개될 내용들이 훤하게 그려져 시시했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떨어져 갖가지 모험을 한다.
이후 괴물을 만나 그를 쓰러뜨리고 영웅으로 등극한다.
이상한 나라에 평화를 되찾아준 앨리스는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정말 딱 이 스토리 그대로다.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모험의 모험을 거쳐, 붉은 여왕의 투사 재버워키와 앨리스가 싸우는 장면은 허탈하기까지 했다.힘든 역경을 거쳐 온 것과는 달리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너무 손쉽게 끝났다.밀리고 밀리다 벼랑 끝에서 단 칼에 적을 무찌르는 그 모습.

이런 류의 영화가 이런 결말을 불러오는 것은 어찌보면 필연적이다.
주인공이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끝나질 않으니 말이다.
혹여나 주인공이 나쁜 무리와 맞서 싸우다 지기라도 하면,
그걸 바라보는 아이들의 마음은 어찌되겠는가.
(권선징악의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도 '주인공'만 승리하는 뻔한 세상ㅠㅠ)


물론 기대없이 봤다면, 재미있었을 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신이 알 고 있는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는
교훈도 나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교육용으로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무한 기대를 갖고 본 나같은 관람객은 이런 생각을 할 것 같다.
화려한 볼 거리에 내용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속 빈 강정같다고 말이다.
스토리를 조금 더 탄탄하게 하고, 러닝타임이 길어질 지라도
뒷 부분을 좀 더 살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 '이상한 나라 곳곳에 숨어있었던 앙증 맞은 재미거리들



붉은 여왕의 파이를 훔쳐먹은 죄로 참수형을 당하는 개구리를 잊을 수가 없다.
윤기 흐르는 초록 빛 유연한 피부. 연기도 수준 급이다.
"네가 먹었니"라고 묻는 여왕의 질문에 잔뜩 쫄은 개구리.
침을 꼴깍 삼키며 자신은 파이를 훔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때의 그 눈빛. 정말 명연기다. 개구리의 연기실력을 보고 반성할 배우 많겠다.
결국 개구리는 사형을 당한다. 결정적 증거를 남겼기 때문이다.
무엇인지는 영화를 직접 보면 알게된다.
끌려가는 그 순간에도 개구리는 이 대사를 잊지 않는다.
"집에 처자식이 있어요, 잘못했어요. 악~!"
연기실력은 물론 센스까지 갖춘 개구리의 명복을 빈다.



만나기만하면 티격태격하는 트위들디, 트위들덤 형제
영화 속 비중은 그리 크지 않지만 보면 볼 수록 빠져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통통을 넘어 뚱뚱한 몸매에 눈치도 없는 편이지만
막상 중요한 순간에는 눈치 99단의 백미를 보여준다. 



새앙쥐. 정말 이렇게 말하면 진부한 말이 될 테지만 이 표현만큼 적절한 게 없다.
"작지만 강하다" 작은 체구에 날쌘 몸놀림. 까칠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조연으로서의 입지가 결코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허리 춤에 차고다니는 저 '눈알'만 봐도 알 수 있다.
인정사정없이 눈찌르기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요 생쥐.
집에서 키우긴 무섭겠지만 영화로 만나기에는 아주 귀여운 친구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ost



에이브릴 라빈의 시원한 목소리가 듣기 좋다.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나오는 음악인데,
나가려는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부여 잡는 곡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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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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