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마라, 눈물이 네 몸을 녹일 것이니 - 이화경
죽을 둥 살 둥하며 힘겹게 보냈던 2009년 가을이었나. 그 당시의 나는 거의 패닉상태였던 것 같다. 누군가 바늘로 콕 찌르기만해도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던 그때. 할 일도 많고, 졸업은 코 앞인데 이놈의 언론계는 날 자꾸 밀쳐내기만 하고, 챙겨야 할 사람은 많고, 꼬박꼬박 오는 문자에 답장은 해줘야 하고, 글도 안써지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정말 말 그대로 살 맛이 안나던 그때였다.
이 책을 만나던 날도 기분이 상당히 별로였다. 수서과에 앉아 미처 채우지 못한 근로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저 죽었다 생각하고 자리에 앉아 새로 들어온 책에 쿵쿵 도장만 찍고 있었다. 이전같았으면 도장따위는 저리로 치워버리고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책이나 야금야금 봤을 내가 말이다. 기계처럼 한 참동안 등록작업을 하고 있던 찰나, 이 책이 눈에 띄었다. 푸른 바탕에 한껏 감상적인 제목을 그려넣은 이화경의 산문집. 인도여행기라는 말에 하던 일을 멈추고 책을 펼쳤다.
촤르륵. 책장을 몇 장 넘기니 이런 구절이 나왔다. '바쁜 생활을 피로를 낳고, 피로는 신경질을 낳고, 신경질은 무관심을 낳고, 무관심은 죄책감을 낳고, 죄책감은 우울을 낳고...... ' 이른바 '낳고 시리즈'. 하마터면 그 조용한 수서과에서 울뻔했다. 이거 내가 쓴 책 아니야?하며 다시 한 번 필자를 확인하기도 했다. 어쩜 이리 내 마음과 같을까.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나의 마음을 체에 걸러 글로 정리한 작가의 능력에 감탄을 보내며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메모장에 적어 놓았다.
메모장에 묵혀 둔지 몇 개월이 꼬박 지나서야 나는 책을 다시 찾았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이었지만, 다시 봐도 좋은 책이었다.
류시화의 인도여행기가 '영적인 성숙'에 방점을 찍었다면,
이화경은 산문집은 있는 그대로의 인도에 '생활'을 발라두었다 말하고 싶다.
필자는 이년동안 인도 콜카타에 머무르며, 보고 느낀 것을 가감없이 책속에 풀어 놓았다. '사치와 허영을 허하라'는 발칙한 말까지 쓰여있으니 공자왈 맹자왈 재미없는 글은 아니란 이야기다.
제법 생활을 발라둔 글이라 해서 '내가 가보니 인도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더라라고 쓰여져있다'는 건 아니다. 만약 그렇게 써있었다면 정말 꺅소리 났을거다. 엄청 실망했을 거다. 굳이 이렇게 길게 감상문을 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건 너무 원초적이며, 산문집이라는 이름이 아까운 책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산문은 가슴에 긴 여운을 남겨야만하는 글이다. 나의 알량한 기준으로 바라봤을 때 이 책은 충분히 합격점!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투씨 로마, 투씨 로마...
인상깊은 대목은 책 곳곳에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바로 여기다. '투씨 로마, 투씨 로마...' 사람이 죽었을 때 유가족이 부른다는 곡의 한 구절이다. 흡사 주문같기도 한 알 수 없는 이 말이 뭐 그렇게 인상에 남냐고? 뜻을 풀어보면 당신도 곧 그렇게 느끼게 될 것이다.
북인도 라다크에서 죽은 자를 화장하기 전 망자에게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를 읽어준다고 한다. 사전의 힘을 잠깐 빌리자. 티베트 사자의 서는 8세기 티베트불교의 대가 파드마삼바바가 티베트 산중에서 쓴 108개의 경전 중 하나로 후세 제자들이 찾아내어 남겼다는 전설의 경전이다. 원래 제목은 티베트어로 '바르도 퇴돌'이라고 한다. '바르도'란 '둘 사이'란 뜻으로 사람이 죽어서 다시 환생할 때까지의 중간 사이를 말한다. 이 상태에 머무는 기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49일로 알려져 있다. '퇴돌'이란 '듣는 것을 통한 영원한 해탈'이라는 뜻이다. 죽음의 순간 오직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삶과 죽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영원한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망자의 영혼이 극락정토에 다다르는 것을 안내하는 '티베트 사자의 서' 독경소리가 떠난 자의 집을 채울 때, 가족들은 애도의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한다. 그 곡소리가 '투씨 로마, 투씨 로마...'
우리 말로 풀이하면 '가을에 지는 잎새 같은, 시간의 잎새'라는 뜻이다. 아름답지 않은가. 인생을 그리고 죽음을 바라보는 그들의 은유적인 시선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삶을 성찰하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책은 문장이 특히나 좋다. 읽는 맛이 난다고나 할까. 드문드문 중복 표현이 있어 거슬리는 구석이 없진 않지만 조각같이 잘 빚어놓은 글이 참 보기 좋다.
'제가 십칠 년 동안 산 시골집 마당 한 구석엔 커다란 물앵두나무가 있었습니다. 이맘때쯤이면 통통히 물오른 앵두, 채 익지도 않은 그 앵두가 너무도 먹음직스러워 나무 아래를 한참이나 서성인 기억이 있습니다.'
글만 읽었을 뿐인데, 탱글탱글한 앵두가 벌써부터 머릿속에 그려진다. 입에는 상큼하고 시큼한 앵두 맛이 감도는 듯하다. 익지 않은 앵두를 바라보며 군침을 다시는 어린 소녀의 그림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참 맛있는 글이다.
그런가하면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에서의 사색'처럼 제법 자연묘사를 그럴 듯하게 하는 구절도 보인다. '어둠이 젖히고 보랏빛 섞인 진한 파란색 하늘이 드러나는 새벽녘을 매직 아워라고 한다지요. 하늘은 동 트는 빛으로 밝아오지만 땅은 먹물 빛으로 여전히 어두운 시간. 그 매직 아워에 역사밖 어슴푸레하던 낡은 건물과 사람들이 점점 제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을 보았어요' 참 아름다운 글이다. 글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배낭을 매고 낡고 거친 인도의 풍경을 바라보는 여행자가 된 것만 같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이는 오직 작가뿐이다. 작가 혼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주욱 늘어놓는다. 독자는 그저 그녀의 이야기를 몇시간이고 묵묵히 들어주는 입장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책을 덮고나면 마치 내가 그녀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인도여행을 한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묘한 느낌이다.
이 책 덕분에 인도로 배낭을 매고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나 더 커져버렸다. 누군가는 이 책에서 위로를 받는다고 한다. 따갑고 아픈 가슴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을 받는다고도 한다. 한때의 나도 그랬다. 그저 몇 줄을 읽었을 뿐인데,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따뜻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내게 이 책은 따뜻한 봄 날 한껏 부푼 가슴 속의 기운을 진정시켜주는 '진정제'다. 언제봐도 좋은 책.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을 기특한 책이다.